고대 로마의 공들 — 머리카락·깃털·공기, 속을 채운 것이 이름이 됐다

시칠리아 빌라 로마나 델 카살레의 바닥 모자이크. 로마인이 몸을 쓰던 자리는 이런 풍경이었어.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로마의 공놀이를 소개하는 글들은 대개 이렇게 시작해. "고대 로마에는 세 종류의 공이 있었다." 깔끔하지? 셋이면 외우기도 좋고, 표로 만들기도 좋고.
그런데 사료에 남은 이름을 하나씩 주워 모으면 셋에서 안 멈춰. 넷이 되고, 다섯이 돼. 더 이상한 건 그다음이야. 다섯을 다 늘어놓고 나면, 이번엔 "몇 종"이라는 질문 자체가 어긋나기 시작하거든.
이름은 다섯 개다
먼저 목록부터 펼쳐놓고 가자.
| 이름 | 실체 |
|---|---|
| pila(필라) | "공"을 가리키는 총칭이자 작은 공. 머리카락을 채운 작고 단단한 공 |
| trigon(트리곤) | 3인이 삼각형으로 서서 주고받는 경기, 그리고 그 공 |
| follis(폴리스) | 동물 방광에 공기를 넣은 큰 공. 주먹·팔뚝으로 쳐올림 |
| paganica(파가니카) | 깃털을 채운 중간 크기 공 |
| harpastum(하르파스툼) | 격렬한 몸싸움 팀 경기, 그리고 그 공 |
다섯이야. "3종"이라는 정리는 볼픽의 속설 판정표에서도 이미 ❌를 받은 항목이고, 공의 세계사 연표에서 "언젠가 따로 풀겠다"고 미뤄둔 줄이 바로 이 다섯 개야. 오늘 그 줄을 펼쳐볼게.
그런데 말이지, 이 표를 위에서 아래로 다시 읽어봐. 뭔가 층위가 뒤섞여 있는 게 느껴지지 않아? 세 개는 "무엇으로 채웠나"로 나뉘어 있고, 두 개는 "몇 명이서 어떻게 노나"로 나뉘어 있어. 이 얘기는 조금 뒤에 다시 할게. 먼저 채워진 것들부터.
pila — 머리카락을 채운 공
로마인의 공은 pila야. 작고 단단하고, 속에 머리카락을 채웠어.
이 단어가 로마에서 차지한 자리가 좀 특이해. pila는 특정한 공 하나를 가리키는 이름이면서, 동시에 "공"이라는 말 자체이기도 했거든. 우리말로 치면 "축구공"과 "공"을 한 단어가 겸하는 셈이야.
그리고 이름이 남긴 뒷이야기가 있어. pila의 원뜻이 "털뭉치"였다는 설이야. 확정은 아니지만 맞다면 이름이 곧 만듦새였던 거지 — 머리카락을 뭉쳐 만든 물건을 털뭉치라 부른 거니까. 이 pila는 로마가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았어. 스페인어 pelota, 폴란드어 piłka가 그 후손이거든. 정작 라틴어의 직계인 프랑스어·이탈리아어는 이 단어를 버렸고. 그 사연은 게르만 \*balluz vs 라틴 pila 편에 따로 풀어놨어.
paganica — 시 두 편에만 남은 공
paganica는 깃털을 채운 중간 크기 공이야. pila보다 크고, 곧 나올 follis보다 작지.
여기서부터가 진짜 흥미로워. 이 공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게 사실상 그게 전부거든. paganica라는 이름의 유일한 전거는 로마 시인 마르티알리스의 에피그램 두 편이야. 시 두 편. 그게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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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알리스 『에피그램』의 필사본(바티칸 도서관 Vat. lat. 2823). 한 권이 끝나는 면이라 맨 아래에 필사를 마쳤다는 기록이 붙어 있어. 로마의 공 목록은 상당 부분 이런 시에 기대고 있어.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한 번 상상해봐. 어떤 로마 시인이 짧은 시를 쓰면서 공 이름 하나를 툭 던져 넣었어. 그가 그 두 편을 안 썼거나, 그 두 편이 필사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면 — 오늘 우리는 이 공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모를 거야. 목록에 이름 하나가 통째로 비었겠지.
그런데 그 마르티알리스가 또 한 번 일을 해. 다른 에피그램 한 편에서 pila와 follis와 paganica를 나란히 늘어놓거든. 세 공을 한 자리에 세워 비교해준 문헌이 있다는 것 — 로마의 공 목록이 지금 모양을 갖춘 데는 이 시의 지분이 커.
고대사를 파고들면 자주 이런 자리에 도착해. 웅장한 유적이나 공식 기록이 아니라, 누군가 가볍게 써 갈긴 몇 줄이 한 물건의 유일한 증거로 남아 있는 자리 말이야.
follis — 방광에 공기를 넣고 팔뚝으로 쳤다
follis는 셋 중 가장 커. 그리고 채운 게 좀 달라. 머리카락도 깃털도 아니고 — 공기야.
만드는 법은 이래. 동물의 방광을 꺼내 바람을 불어넣어 부풀려. 끝이야. 속을 무언가로 채워 무게를 주는 대신 비워서 가볍게 만든 공이지. 그러니 노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어. follis는 던지고 받는 공이 아니라 주먹과 팔뚝으로 쳐올리는 공이었어.
여기서 잠깐. 주먹과 팔뚝으로 공기 든 공을 쳐올린다 — 이 문장,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체육 시간에 배구공 받다가 팔뚝만 벌겋게 됐던 기억, 아마 하나쯤 있을 거야. 그런데 배구가 세상에 나온 건 1895년, 미국 홀리요크의 YMCA 체육관에서였어. 처음 이름은 배구도 아닌 민토넷이었지. 로마의 follis와 그 사이에는 1,800년이 놓여 있고, 둘을 잇는 어떤 계보도 알려진 바 없어. 공기 든 공을 손에 쥔 사람이 하게 되는 일이, 그냥 두 번 따로 발명된 것에 가까워.
방광 쪽 이야기도 하나 남겨둘게. 동물 방광을 공으로 쓰는 방식은 로마에서 끝나지 않았어. 19세기 럭비공도 돼지 방광이 속이었고, 공이 타원인 이유도 거기서 나왔거든. 그 이야기는 럭비공은 왜 타원인가에 적어뒀어.
trigon과 하르파스툼 — 여기서 목록이 안 닫힌다
이제 남은 둘. 그리고 아까 미뤄둔 이상한 지점.
trigon은 세 사람이 삼각형으로 서서 공을 주고받는 경기야. 사료에는 pila trigonalis라는 긴 이름으로도 적혀 있어 — 보다시피 이름 안에 pila가 들어가 있지. harpastum은 정반대야. 몸을 부딪치며 뺏고 뺏기는 격렬한 팀 경기고, 그림 증거도 남아 있어(오스티아 유적의 모자이크가 대표적이야).
눈치챘어? 이 둘은 공이 아니라 경기야. 정확히는 경기 이름이자 그 경기에 쓰는 공 이름이지. 로마인은 둘을 굳이 구분해 부르지 않았어.
그래서 이런 일이 생겨. 앞의 셋은 속에 무엇을 넣었는가로 갈린 이름이고, 뒤의 둘은 어떻게 노는가로 갈린 이름이야. 게다가 서로 배타적이지도 않아. 하르파스툼 경기에 쓰인 공은 그 자체로 하르파스툼이지만, 만듦새로 보면 어느 계열이었을 텐데 — 사료가 거기까지는 답해주지 않거든.
그러니까 "로마의 공은 몇 종이었나"라는 질문은, 애초에 로마인이 세지 않은 방식으로 세려는 시도야. 다섯이라는 답이 셋보다 정확한 건 맞아. 하지만 다섯도 목록이지 분류는 아니야. 이 목록에 든 이름들은 같은 서랍에서 나온 게 아니거든.
로마의 공은 종목이 아니라 속으로 갈렸다
오늘 우리가 공을 나누는 방식은 종목이야. 축구공, 농구공, 배구공, 야구공. 공의 이름은 그 공이 들어가는 경기가 정해주고, 규격표가 둘레와 무게와 반발을 숫자로 못박지.
로마는 반대편에서 출발했어. 머리카락이면 pila, 깃털이면 paganica, 공기면 follis. 공을 손에 쥐었을 때 어떤 느낌인가 — 그게 이름이 된 거야. 단단한지 물렁한지, 무거운지 가벼운지. 경기가 아니라 감촉으로 공을 부른 셈이지.
그리고 그 목록은 지금도 안 닫혀 있어. 로마의 공 이름 하나는 시 두 편에 매달려 겨우 살아남았고, 다른 둘은 공인지 경기인지 구분되지 않은 채로 남았어. 2,000년 뒤 누군가 우리 시대의 공을 목록으로 만들 때도, 아마 몇 칸은 이렇게 비어 있을 거야.
다음 공의 세계사 편은 로마에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로 가. 『오디세이아』 6권에서 공주 나우시카아가 시녀들과 해변에서 공을 던지는 장면, 그리고 서기 2세기의 의사 갈레노스가 「작은 공 운동에 관하여」라는 소논문에서 공 운동이 최고의 운동이라고 주장한 이야기야. 고대의 홈트 예찬이라고 할까.
핵심 정리
- 로마 공의 이름은 "3종"이 아니라 다섯 — pila·trigon·follis·paganica·harpastum
- pila는 머리카락을 채운 작고 단단한 공이자 "공" 총칭. 원뜻 "털뭉치"설은 미확정
- paganica(깃털)의 유일한 전거는 마르티알리스 에피그램 2편뿐
- follis는 동물 방광에 공기를 넣은 큰 공 — 주먹·팔뚝으로 쳐올림
- trigon·harpastum은 공 이름이자 경기 이름 — 그래서 다섯도 분류가 아니라 목록이야
자주 묻는 질문
Q. 그래서 로마의 공은 정확히 몇 종이야?
A. 이름은 다섯이야. 다만 그 다섯이 같은 기준으로 나뉜 게 아니라서, "몇 종"이라는 답이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아. 셋은 속을 채운 재료로, 둘은 경기 방식으로 갈린 이름이거든. 흔히 도는 "3종"이 틀렸다는 것만은 분명해.
Q. harpastum이 축구나 럭비의 조상이야?
A. 그렇게 이어주는 근거는 없어. 하르파스툼에 대해 확인되는 건 격렬한 몸싸움 팀 경기였다는 것과 그림 증거가 남아 있다는 것까지야. 중세 몹 풋볼이나 1863년의 성문화로 이어지는 계보는 별개 이야기고, 그건 연표에 정리해뒀어.
Q. follis가 배구의 조상이라는 말도 있던데?
A. 두 종목을 잇는 계보는 알려진 게 없어. follis가 공기를 넣은 공을 주먹·팔뚝으로 쳐올리는 놀이였다는 사실과, 1895년 미국에서 배구가 따로 고안됐다는 사실이 나란히 있을 뿐이야. 닮았다는 관찰까지가 안전한 선이지.
Q. paganica라는 이름은 무슨 뜻이야?
A. 이 글에서는 답하지 않을게.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들이 돌아다니지만, 볼픽이 쓰는 출처들이 담보하는 건 "깃털을 채운 중간 크기 공"과 "마르티알리스가 두 번 언급했다"까지거든. 근거가 확인되면 그때 채워 넣을게.
Q. 다음 글은 언제?
A. 다음 편은 고대 그리스야. 『오디세이아』 6권의 나우시카아 공놀이 장면과, 갈레노스가 "작은 공 운동"을 최고의 운동이라고 주장한 소논문 이야기를 풀어볼게.
출처
| # | 출처 | 확인 항목 |
|---|---|---|
| 1 | Perseus, Lewis & Short "pila" | pila의 실체·총칭 용법, 마르티알리스 언급 |
| 2 | 고대 구기 종목 연구 논문 (oapub.org) | 로마 공놀이 유형·harpastum |
| 3 | Health & Fitness History — Roman Pila Balls, Follis, Paganica, Trigon | 네 공의 속재료·크기 구분 |
| 4 | FIVB, History of Volleyball | 1895년 배구 고안·민토넷 |
태그: #고대로마 #하르파스툼 #로마공놀이 #마르티알리스 #고대사 #공의세계사 #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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